22살의 어린 숙녀.. 떡집을 시작하다


김영순 대표는 1984년부터 떡을 빚었다. 다사다난 했던 그 해는 둘째 아들을 낳은 직후(22살)였다. 김영순 대표가 떡집을 열게 된 이유는 단순히 아이들 때문이었다. 직장을 다니는 남편이 가져다주는 생활비로는 많이 부족했고, 커가는 아이들의 분유 값,과자 값이라도 벌어서 먹일 마음으로 떡집을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22살의 어린 숙녀가 무모하다 싶지만, 김영순 대표가 그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자’가 아니라, ‘엄마’였기에 때문이었다.

“신랑이 겁이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는 일을 하는 것에 겁을 낼 수 없었어요. 당장 분유가 없으면 아이들이 굶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일을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떡집을 준비하기 위해 그녀는 떡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을 수소문했다. 마침 강릉 중앙시장 내에 있는 서울떡집에서 떡 기술을 가르쳐 준다기에 그곳으로 찾아갔다. 서울떡집은 개피떡(강원도에서는 월편이라 불림)과, 기정떡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서울떡집 주인이 개피떡 시범을 보인다음, 한번 해 보라고 했는데, 그녀가 떡을 빚고 나니, “넌 어디서 떡을 배워왔구나” 라고 하며, 왜 떡을 배우러 왔는지 되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은 기정떡을 만들었고, 셋째 날에는 더 이상 오지 말고, 가서 떡집을 차리라고 말했다. 김영순 대표는 서울떡집 주인이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셋째 날 부터는 가르쳐 줄 떡이 없다고 말하며 어여 가라고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떡을 배우고, 강릉떡집(참순찰떡방 전신)을 열게 된 것이다.

강릉떡집! 웃음과 눈물의 회전무대!


강릉떡집을 열자마자 손님들이 몰려왔다. 우선은 22살의 어린 엄마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많은 주변 사람들이 많이 응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영순 대표의 솜씨가 다른 떡집에 비해 월등히 좋았기 때문이다. 가장 꽃다운 20대에 그녀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 취업해서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 또한 사치라고 생각하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떡집이 자리 잡아갈 즈음에 고민거리가 생겼다. 장사가 잘 되는 것이 한편으로는 걱정으로 밀려왔다. 손님은 밀려드는데, 일을 다 소화해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그때 당시에도 개피떡을 일일이 손으로 밀었기 때문에 기계에서 나오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손님들이 쌀의 중량을 속여서 가져다 줘서 정말 마음이 어려웠다.

“지금이야 저희가 좋은 쌀을 납품받아 떡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손님들이 쌀을 가지고 와서 떡을 해 드리고 공임을 받는 시스템이었어요. 손님들이 쌀 한말을 가져왔다고 했는데, 중량을 달아보면 한말 반, 심지어 두 말까지도 가져오시는 분들이 계셨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다 해드릴 수밖에 없었죠. 또 어느 한날은 약식을 주문한 손님이 있었어요. 서울떡집에서 약식을 배운 적이 없는데, 그냥 주문을 받고 했습니다. 겁이 없었던 건지 자신감이 넘쳤던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눈으로 약식을 한번 보고 이렇게 하면 되겠다 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약식을 했습니다. 그 후에는 월편보다 약식을 더 많이 주문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명절 때에는 눈코뜰 새 없이 정말 많이 바빴다. 모든 떡집이 명절에 바빴겠지만, 진부떡집은 유난히 그랬다. 심지어 손님들끼리 서로 주문하겠다고 다툼이 있기도 했고,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밤을 세워가며 떡을 빚었다. 명절 휴일에는 남편이 일일이 배달을 했고, 어느 추석 명절 때에는 이틀 밤을 세워가며 추석날 아침까지 떡을 빚기도 했다. 김영순 대표는 그때의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추석날 아침까지 기진맥진해서 떡을 빚고 금산(강릉 외곽)에 있는 시댁엘 갔어요. 시어머니께서 정말 엄한 분이셨어요. 마당에 들어서면 개가 짖는데, 작은 시어머니, 형님, 고모들이 나와서 반기는데 시어머니께서 나와 보지 않으시는 거에요. 그때 얼마나 서러운지, 집에 와서 몰래 한참을 울었답니다”


떡집을 돌보느라 육아에는 큰 신경을 쓰지 못했다. 집안 살림도 그랬다. 정작 아이들을 위해 시작한 떡집인데, 결국에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

“떡집을 시작하고 엄마가 오셔서 아이들을 돌봤고, 동생이 살림을 대신했고, 할머니께서도 도와 주셨어요. 떡집을 하면서 결국 가족에게 많은 빚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도 떡집 문을 열 때면, 그때 엄마가 많이 생각납니다. 떡집에서 웃기도 많이 웃고, 울기도 많이 울고 그랬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음식을 배우다!


“할머니는 음식 하실 때 손이 매우 빨랐어요. 집에 13명의 가족이 살았었는데, 단 한 시간 만에 많은 음식을 하는 걸 보고 놀랐죠. 지금도 할머니가 해 주셨던 두부, 올챙이 국수, 메밀 국수는 잊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아주 정갈하게 음식을 하셨어요. 그 두 분 밑에서 눈썰미로 음식을 배웠고, 그렇게 떡과 음식을 시작 했던 거 같아요. 제가 16살 때, 중학교 3학년 때 였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막내 삼촌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는데, 마침 그때 집안에 일이 있어서 저랑 동생 둘만 남아 있었어요. 오랜 만에 본 삼촌이 너무 반가워서 삼촌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어서 삼촌이 가장 좋아하는 두부를 만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정신으로 그때 두부를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동생하고 콩을 삶고, 맷돌에 갈고, 간수를 맞추고 틀에다 두부를 누르고... 그렇게 두부를 만들었어요.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고 할머니 옆에서 시중들며 눈썰미로 배운 건 데.. 그때 삼촌이 정말 맛있게 두부를 잡숫던 게 생각 납니다”


김영순 대표는 떡 뿐만 아니라 음식 솜씨도 뛰어나다. 그리고 그의 음식 솜씨 또한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녀의 할머니(지금도 생존해 계심)는 동네 잔치가 있을 때 마다 불려 다니며 음식을 했고, 동네에서도 솜씨가 좋기로 유명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음식을 아주 정갈하고 깔끔하게 음식을 했다. 그녀와의 인터뷰 속에서 그녀는 작고하신 어머니와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많이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떡과 음식은 단순한 맛을 넘어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했던 추억과 그리움이 서려있는 듯 했다.

참순찰떡방! 정직과 신뢰를 드리는 떡!


“모든 일에는 절차와 규칙이 있는 법이고 음식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더 많은 이익을 위해서 서두르고, 편법을 쓰는 것은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저희 업체에 납품을 해 주는 곳에서도 화학 첨가물을 가끔씩 이야기하는데, 저는 지금까지 화학 첨가물을 본적도 없기에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느리더라고 옳은 방법으로 떡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떡을 쌓아두고 팔지 못하고, 냉동 보관한 떡을 해동해서 팔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입니다. 빚은 그 자리에서 떡을 팔아야 합니다. 손님들에게 다소 기다리는 불편을 드리더라도, 이것은 제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김영순 대표의 떡을 만드는 철학은 분명하다. 그녀가 떡을 만드는 절차 규칙에 있어서 어떠한 타협점도 찾을 수 없었다. 지난 34년간 참순찰떡방을 이용한 손님들 역시 김영순 대표의 이러한 고집스러움을 믿고 지금까지 함께해 오고 있지 않을까 한다.

Epl 인터뷰를 하는 내내 내가 느꼈던 감정은, 김영순 대표는 단순히 떡을 빚는 것이 아닌, 지난 무수한 세월 동안 그녀의 눈물, 기쁨, 아픔, 환희 등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 인생을 빚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